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코류 카게미츠 (문단 편집) === 내력 === [[야마다 아사에몬]]의 기록에 의하면 마데노코우지 후지후사(萬里小路藤房)[* 1296~?, [[가마쿠라 시대]] 말과 [[남북조시대(일본)|남북조시대]]에 활약했떤 쿠게(公家)로, 츄나곤(中納言)직에 있었다. [[에도시대]]에는 구스노키 마사시게, [[타이라노 시게모리]]와 함께 일본삼충신(日本三忠臣)으로 불린다.]가 구스노키 마사시게에게 넘겨주었으며, 이후 [[도요토미 히데요시]]와 [[도쿠가와 이에야스]]의 손을 거쳤다라고 되어 있다. 그러나 1719년 쇼군 [[도쿠가와 요시무네]]의 명에 의해 도검 감정의 명가 혼아미(本阿弥)에서 전국의 명검들을 조사해 작성한 교호명물장(享保名物帳)에 등장하지 않는 등, 의심이 가는 부분들이 많다. 코류 카게미츠의 행방은 묘연한 상태였으나, [[에도 시대]] 말에 어떤 [[카와치]]의 농가에서 발견되었다. 이를 한 도검상이 구해다가 혼아미가에 감정을 의뢰했다. 혼아미 측에서는 위작이라 판단하고 감정서 발급을 거부하였다. 이후 나카무라 카쿠타유(中村覚太夫)라는 한 지방관에게 팔렸다. 그가 죽고 나서 1846년에 다른 도검상에게 팔렸다. 이후 [[조슈 번]]의 다이묘인 모리(毛利)가에서 구매했으나 혼아미가 감정서를 발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반품하였다. 그 다음에는 [[참수형]] 집행 및 도검 감정을 업으로 삼던 [[야마다 아사에몬]]가에 넘어갔다. 6대 야마다 아사에몬인 요시마사(吉昌)는 코류 카게미츠를 다이로 이이 나오아키(井伊直亮)에게 넘겼으며, 대신 나오아키는 야마다 아사에몬 요시마사의 의형제인 미와 토쿠조(三輪徳蔵)를 휘하로 들였다. 그러나 1860년, 나오아키의 아들 [[이이 나오스케]]가 [[사쿠라다 문 밖의 변]]으로 암살당했다. 이 때문에 미와 토쿠조는 해고, 코류 카게미츠는 다시 야마다 아사에몬에게 돌아왔다. [[메이지 유신]]이 일어난 후 1873년에 코류 카게미츠는 [[천황]]가에 헌상되었다. 코류 카게미츠를 [[메이지 덴노]]가 서양의 [[세이버]]식으로 꾸며 패용했다는 일화가 전하지만, 일본의 도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정말로 메이치가 패용했는지 여부를 두고는 서로 의견이 엇갈린다. [[태평양전쟁]]이 끝난 이후 [[도쿄국립박물관]]으로 옮겨 소장중이고 [[일본의 국보]]로 지정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